J Korean Soc Cosmetol > Volume 27(2); 2021 > Article
대한민국 미용명장의 생애사 연구: L명장의 사례를 중심으로

Abstract

This study examines record and analyze the history of beauty industry and beauty education and through this, it is meaningful to establish the value and identity of beautician and to provide basic data for beauty research. For this purpose, collected data mainly narrative interview with a Korean beauty master as a convenience sampling.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re are gender and period differences in the opportunity to enter the beauty industry. Currently, beauty education has reached the level of higher education, but in the past, the emphasis was focused on technical education in addition, opportunities for education have been concentrated in Seoul. Second, the beauty industry began to attract attention in the 1970s as the standard of living in Korea increased. In particular, the hair salon in Myeong-dong, Seoul, is a consumption space for female customers, indicating that the beauty industry contributed to the trend, economic development and circulation. Third, the development of the Korea beauty industry from the 1980s has been accompanied by voluntary beauty education. Educated in Japan and Europe, that has had a positive effect on the Korean beauty industry and beauty education. Fourth, beauty masters can be recognized for their achievements and value by having expertise in both technical, teaching, service and business aspects.

I. 서 론

현대사회는 산업의 고도화로 생산과 소비가 활발해졌고 국가 간 수출·입의 활성화는 물자의 융통으로 이어졌다. 특히 우리나라 산업은 6.25 전쟁 이후 1970년대를 거치면서 구조적·성격적으로 대대적인 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는 산업노동자라는 계급 형성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필요한 노동인력을 확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능인, 기술자라는 직업적 특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였으며 특히 남성에 비해 여성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으로 차별받아왔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차별 속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날 여성의 사회활동과 경제적 자립을 이끌고 지위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역사적 주역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Sungkonghoe University Social and Cultural Research Institute, 2002).
정부는 숭문천공(崇文賤工)의 사회적 인식을 극복하기 위하여 1989년 기능장려법을 제정하였고, 2010년부터는 숙련기술 장려법으로 개정하였다. 이와 함께 산업현장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로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 1986년 제1호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하여 사회적 인식제고 및 산업경쟁력을 강화하였다(Cho et al., 2013). 대한민국 명장은 산업 현장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자로서 15년 이상의 경력을 갖추어야 하며, 연 1회 37개 분야 97개 직종에서 선발한다. Korean Master hand Association(http://kmasterhand.or.kr)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총 640명 중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7:3 이며, 여성 명장이 많은 분야로는 미용과 한복이 대표적이다.
미용은 여성이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대표적인 근대적 산업이었지만, 지금껏 여성 노동에 관한 연구에서 미용명장은 주요 연구 대상으로 다루지 않았다. 미용명장은 한평생 미용업에 몸담고 기술 발전과 산업 성장에 기여함으로써 오늘날 세계적인 K-Beauty로 거듭난 미용산업의 근간을 이룬 역사적 산증인이다. 2002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선발된 대한민국 미용명장은 총 9인으로, 평균 40년 이상 종사한 이들의 생애는 미용산업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으며 차세대 미용인 양성, 기술보급을 위해 이루어졌던 미용교육 또한 이들의 생애와 깊은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미용산업 및 미용교육 발전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당사자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용명장에 대한 생애사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생애사 연구방법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인 맥락을 발견하여 이야기로 기술하는 방법으로 참여자의 생애사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역사적 삶, 특히 직업적 삶을 추적하고 특정한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다(Kim & Han, 2012). 그러나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대한민국 명장에 대한 연구는 대한민국 명장 제도(Park, 2011), 명장의 장인 정신과 진로교육(Chang & Kim, 2013), 일터경험 학습을 통한 명장의 성장과정(Lee, 2011), 섬유와 공예 부문 명장을 집대성한 연구(Cho et al., 2013)가 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용 분야에서는 미용명장이 아닌 1세대 미용사의 여성정체성과 직업의식에 관한 구술 생애사를 다룬 연구(Kim, 2012b)가 있지만 미용명장에 관한 생애사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미용명장이 단 9인뿐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명장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 교육, 봉사, 사업적 측면 모두에서 전문성을 보유함으로써 그 업적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대한민국 미용명장의 생애사를 개인의 구술을 통해 재구성하고 연구함으로써 미용산업과 미용교육의 역사와 발자취를 기록하고 분석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이를 통해 미용 기술인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용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데 의의가 있다.

II. 이론적 배경

1. 대한민국 미용명장

대한민국 명장이란 <숙련기술장려법> 제11조 규정에 따라 산업 현장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로서, 숙련기술 발전 및 숙련기술자의 지위 향상에 크게 공헌한 사람을 지칭한다.
<대한민국 명장 선정 및 우대 등에 관한 규칙> 제10조 규정에 따라 고용노동부 장관이 고시한 37개 분야 97개 직종에서 15년 이상의 경력자를 대상으로 기계, 재료, 전기, 통신, 조선, 항공 등의 산업분야와 금속, 도자기, 목칠 등의 공예분야에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명장의 자격은 숙련기술의 보유 정도가 높고 신청 직종의 숙련기술 발전을 위한 성과 및 숙련기술자 지위 향상을 위한 성과가 우수한 자(<대한민국 명장 선정 및 우대 등에 관한 규칙> 제9조)로 시·도지사 또는 직종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혹은 중소기업청장의 추천을 받아 신청이 가능하다. 매년 사업계획에 따라 선정하며 통상적으로 35명 이내로 선발한다. 대한민국 명장을 선정 및 우대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숙련기술자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도록 함과 동시에 능력 중심의 사회를 정착시키는데 기여하고, 숙련기술자 스스로가 자부심과 긍지를 갖도록 하며 국가, 사회, 학교 및 기업이 숙련기술을 존중하는 풍토조성에 앞장설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Korean Master hand Association, http://kmasterhand.or.kr).
대한민국 명장 37개 분야 중 하나로 이·미용 분야는 이용과 미용 2개 직종으로 나뉜다. 대한민국 명장회에 따르면 미용 직종의 세부 직무내용은 얼굴, 머리, 피부 등을 손질하여 사람의 헤어스타일을 만들고, 얼굴 등의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작업으로 고시되어 있다.

2. 미용의 역사

1) 미용산업의 역사

1933년 화신백화점 내 화신미용실을 연 오엽주 선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용실을 개설한 최초의 미용인이다. 영화 공부를 위해 유학 갔던 일본에서 미용 공부를 하고 돌아와 미용실을 경영한 오엽주 선생은 1945년 해방 후에는 미용학원을 개설하였다(Jun et al., 2008).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후반에는 여성들의 사회 참여 확대로 특수층과 부유층이 주 고객이었던 미용실이 대중화됨에 따라 헤어스타일이 다양해지고 미용사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며 미용실이 늘어났다. 1957년에는 전국의 미용조합연합회를 총망라하여 대한미용총연합회를 발족시켰고 1961년에는 연합회를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켰다(Kwak et al., 2006).
Statistics Korea (https://kosis.kr/search/search.do) 자료에 따르면 미용업의 업체 수는 1985년 42,081개에서 2016년 95,822개로 30년간 2배 이상 증가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호텔이나 시내 중심가 등의 전문 미용실과 동네의 지역 미용실로 양분화 되는 경향을 보였으나 이후 프랜차이즈 형식의 표준화된 형태의 미용실로 확산되고 있다(Choi, 2010).

2) 미용교육의 역사

우리나라 미용교육은 1933년 오엽주 선생의 미용실 개설 이후, 일본인 다나카(田中)가 서울에 설립한 ‘다나카 미용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교육기관이 되었으며 그 곳에서 우리나라 미용사를 양성하고 배출하기 시작하였다(Jung, 2008).
해방 이후 1945년 김상진 선생이 ‘현대 미용학원’을 설립하였으며 미용실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미용업을 하는 여성들의 권익보호와 친목을 위하여 미용조합연합회가 구성되었다. 1948년 서울시 위생과의 관리 하에 제1회 미용사 자격시험이 제정되었다(Kwak et al., 2006). 어깨 너머 교육을 받거나 도제식으로 교육을 익히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미용교육기관의 필요성은 절실하였다.
1950년대 서울고등기술학교와 현대 미용학원이 있었으며 1951년 부산 대한군경원호고등기술학교에 이어 1952년 권정희 선생이 최초의 미용교육 기관인 정화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하였고 2020년 현재는 대학교로 미용교육기관으로써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 선생에 사사한 임형선 선생은 1954년 예림고등기술학교의 전신인 예림학원을 설립하여 미용교육의 장을 열었다(Kim, 2009).
1980년대 이전까지 고등기술학교, 미용학원 외에 학문적인 기틀을 마련하지 못했지만, 1983년부터 전문 미용학원, 미용 관련 대학과 대학원, 대학 내 사회교육원 등 다양한 형태로 미용교육기관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3. 생애사 연구

질적 연구 방법은 크게 현상학, 근거 이론, 생애사 연구, 사례 연구, 문화기술지적 연구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 생애사 연구는 연구 대상자의 생애사를 분석 자료로 사용하며 인문학, 교육학, 사회과학에서 널리 각광받고 있는 질적 연구 방법이다(Kim & Han, 2012).
개인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적 조건을 탐색하는 사회학의 한 갈래였던 생애사 연구는 1930년대 시카고대학 사회학부에서 파생하여 시카고학파라 칭하였다. 시카고학파는 미국의 도시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개인의 삶을 관통하여 탐구하는 한편, 생애사 연구를 방법론적으로 정립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통계학의 등장과 추상적 이론 개발이라는 근본적인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이유로 생애사 연구는 쇠락의 길에 이르게 된다(Lewis, 2008). 생애사 연구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실증주의에서 추구하는 추상적 이론과 다른 이야기를 지식으로 인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그 결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이후로는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이다(Kouritzin, 2000). 197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여성의 생애사 연구가 여성학, 인류학, 문학 등의 분야에서 연구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부터 여성 연구에 질적 연구 방법을 적용하면서 여성의 구술 생애사와 자기 진술이 연구 주제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생애사는 내러티브(Narrative) 형식을 포함한다. 연구 참여자는 개인 삶의 경험을 자신이 이해한대로 재해석하여 다시 이야기하고 삶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자신만의 고유한 이해 방법과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이에 연구 참여자는 연구 참여자의 내러티브에 담겨있는 의도와 의미를 발견하여 새로운 관점에서의 해석과 재해석의 과정을 포함하여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Lee, 2005).
개인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인 맥락을 발견하여 이야기로 기술하는 생애사 연구는 참여자의 생애사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역사적 삶을 추적하고 특정한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다(Kim & Han, 2012). 따라서 생애사 연구방법은 개인의 직업적 삶을 탐구하는데 용이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Wicks & Whiteford, 2006).
Kim & Han (2012)은 생애사 연구의 세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첫째, 생애사는 사회학적 안목으로 해석한다. 둘째, 삶의 이야기의 전경인 시간성에 초점을 둔다. 셋째, 연구자와 참여자의 유기적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Harnett (2010)은 생애사 연구를 과거의 기록을 재구성하는 삶의 이야기는 그 경험을 해석하는 참가자와 연구자들 간의 협력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III. 내용 및 방법

본 연구는 숙명여자대학교 생명윤리위원회의 심의(SMWU2006-HR-047)를 거쳐 진행되었으며,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론적 배경에서는 대한민국 미용명장과 미용의 역사, 생애사 연구에 대해 알아보고, 실증적 연구에서는 연구 참여자의 삶을 시간적 맥락에 초점을 두어 ‘미용에 입문하기’, ‘미용사로 홀로 서기’, ‘미용교육자로 역할하기’, ‘미용명장으로 우뚝 서기’로 나누어 명장 선정 이전과 이후의 삶을 통해 미용산업과 미용교육의 역사적 맥락을 도출하였다.
연구방법으로, 이론적 배경에서는 대한민국 미용명장과 미용의 역사, 생애사 연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국내외 문헌과 선행연구를 중심으로 문헌고찰을 진행하였고, 실증적 연구에서는 내러티브 형식을 도입하여 대한민국 미용명장 개인의 생애를 살펴보기 위해 심층적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연구 참여자를 선정하기 위하여 최초로 미용명장이 배출된 2002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선발된 대한민국 미용명장 9인에 대한 정보를 대한민국 명장회에 의뢰하였으나, 개인정보보호법에 의거하여 미용명장과의 개별접촉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생애사 자료는 일회성이 아닌, 다년간에 걸쳐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연구 참여자와의 계속적인 면담으로 수집하여야한다는 Kim & Han (2012)의 연구와, 개인의 삶을 탐구하는 생애사 연구방법으로 1인 연구를 진행한 Kang et al. (2020), Lee & Rhie (2020), Lim & Kim (2020)의 연구를 근거로 연구자와 다년간 라포(Rapport)가 형성 된 지인 1인을 연구 참여자로 임의 표집(Convenience sampling) 하였다.
인터뷰는 집중 인터뷰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장소는 연구대상자의 개인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뷰는 1회 2시간씩, 총 5회 진행하였고, 기록은 연구대상자의 동의하에 녹취하여 문서화하였다. 질문은 총 34문항으로, 질문 내용은 일반적 특성, 미용 입문 단계, 명장 선정 이전, 명장 선정 이후의 삶에 관한 주제로 크게 나누어서 진행하였다. 연구 참여자의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연구결과에서는 ‘미용에 입문하기’, ‘미용사로 홀로서기’, ‘미용교육자로 역할하기’, ‘미용명장으로 우뚝서기’로 재구성하여 서술하였다. 연구 참여자의 호칭은 L명장으로 표기하였다.
연구자는 생애사 연구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섯 가지 준거(Goodson & Sikes, 2001)에 기초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첫째, 편안한 분위기에서 평소 대화처럼 인터뷰를 진행하여 연구 참여자와의 자연스러운 ‘대화성’을 유지하고 둘째, 연구 참여자의 기술내용을 그대로 표현하여 ‘반영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셋째, 녹취록에 대한 ‘연구 참여자 검증’(member checking)을 진행하였으며 넷째, 연구 참여자의 생애에 대한 다양한 사진자료를 수집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이끌어냄으로써 ‘진정성’을 확보하고(Lim & Kim, 2020), 다섯째, 연구 참여자의 고유한 경험과 미용교육, 미용산업의 역사적 사실을 연결시켜 ‘맥락성’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IV. 결과 및 고찰

1. 미용에 입문하기

1) 진로 선택

L명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이던 1941년 충청남도 온양(現충청남도 아산시)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고향에서 꽤 넉넉한 부농이었지만 그가 5세 되던 해에 어머니가 작고하시며 새어머니의 손에 자라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명석했던 그에게 아버지는 대학만 나오면 여성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새어머니의 주장으로, L명장은 미용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아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예산여고를 다니던 그는 1961년 서울 소재 정화고등기술학교(現정화예술대학)로 들어가 미용의 길로 입문하게 되었다.
L명장의 삶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50~60년대 우리나라 여성들은 대학을 졸업하거나 유학을 다녀온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생산직이나 단순 기술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미용사도 이러한 단순 기술직의 하나로 인식되어(Kim, 2006) 여성의 직업으로서 선호되었다.
이처럼 당시 남아선호사상과 경제적 여건 등 여성의 대학진학이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남성과 달리 여성은 진로 선택의 기회가 적었으며, 따라서 미용사라는 진로를 선택하게된 계기에는 성별 및 시대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2) 명동에서의 시작

L명장이 1962년 정화고등기술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담임선생님은 그의 성실성과 실력을 인정하여 명동 ‘허바허바 미장원’에 취직하도록 추천해주었다.
‘한국의 유행은 서울에서 퍼지고, 서울의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된다’(동아일보, 1957.11.25)라고 할 정도로, 서울에서 명동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가장 번화한 곳이자, 최신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 곳이었다(Kim, 2012b). 명동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은 ‘최고’와 ‘최신’을 추구하며 유행을 만들고 퍼뜨렸는데 그 시초가 명동의 양장점과 미장원이라고 평가되었다. 명동에는 수십 개의 양장점과 허바허바 미장원, 백난 미장원과 미스코리아 배출로 유명한 ‘마샬 미용실’을 비롯하여 약 18개 정도의 미장원이 위치하며 여성의 소비 공간(Kim, 2012a)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L명장이 근무하던 허바허바 미장원은 당시 고관 부인들이 다니던 호화 미용실로 국회의원 부인, 여대생, 다방 여종업원 등 다양한 고객층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을 배우고 있었다.
“다방 종업원들 머리를 하려고 일찍 간 거야. 청량리에서 전차 타고 을지로입구에 내려서 뉴욕 빵집에서 빵 하나 사먹고 청소하고 다방 종업원들 머리를 한 거지. 육본에 장군 부인들이 자기 로션을 가지고 오면 세트 말아서 윤기가 자르르 하게 나게 해줬지.” (1차 인터뷰 중 일부)
한국미용의 역사를 기록한 Jeonghwa Arts College의 「60 years of Korean beauty, 60 years of purification beauty: 1951- 2011.」 (2011)에 따르면 명동의 미용실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주로 장차관급, 국회의원의 가족, 교수, 영화배우, 탤런트, 미스코리아들이었다고 기술한다. 이처럼 명동 미용실을 이용한 다양한 상류고객층으로 미루어 보아 유행과 경제발전 및 순환의 중심에는 미용산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 이라고도 안 해. 언니라고 하고 기술도 안 가르쳐줘. 그냥 눈으로 보고 배워야 해. 눈으로 보고 스스로 따라해 보고. 그러면서 배우라고 했어. 우리 때는 월급이 없었어. 디자이너가 되어야 월급이 오 천원. 그 전까지는 그냥 밥 먹여주고 재워주는 게 다였지.” (1차 인터뷰 중 일부)
상기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근대화 이후 미용사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직종 중 하나였고 그마저도 초기 3년 동안은 무보수로 근무하는 것이 규칙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월급도 제대로 받기 힘들었던 그 시절, 아끼고 절약하고(Kim, 2012) 기술연마에 노력하며 미용사로서 홀로서기를 꿈꾸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2. 미용사로 홀로서기

1) 헤어디자이너 승급

L명장은 명동 ‘허바허바 미장원’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순간부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비로소 상급자의 도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그 후 완벽하게 배웠다고 느낀 순간까지는 총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헤어 디자이너’로서 독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3년 정도 배우니까 웬만한 디자이너가 됐지. 아주 완벽하게 잘 해야 돼. 아이롱도 잘 해야 되고, 업스타일도 잘해야 돼. 메이크업도 해야 되고. 그러니까 배울 만큼 배웠다 싶은 건 5년. 피눈물 나게 일거리 찾아가며 열심히 일했지.” (2차 인터뷰 중 일부)
1960년대 당시 명동처럼, 현재의 청담동은 유행을 선도하는 곳으로 최근 기사에 따르면 청담동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승급하는 시간은 평균 5~7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The Hankyoreh, 2018.12.03.). 이는 1960년대와 비교해볼 때 최근 2020년대에 오히려 디자이너로 승급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내가 아이롱은 최고지. 사람들이 내가 파마 하는 걸 보면 이런 거 못 봤다는 거야. 꼼꼼하게 말고 머리도 안상하게 했지. 옛날에 아이롱을 하면 연탄불에 달궈서 하고, 가스 불에 달궈서 하다가 전기로 하게 된 거지. 일본에서 들여와서 불파마도 했어. 밀크파마, 올리브파마라고 있었어. 비쌌지. 제품(약)이 없어서 일제 사다가 했어.” (2차 인터뷰 중 일부)
당시 쌀 한가마니 정도의 가격이 들 정도로 고가여서 펌(Perm)이 대중화 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L명장은 남다른 펌 기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내러티브를 통해, 광복 후의 펌은 주로 전기 펌이었으나 북한 화력발전소에서 전력 공급을 중단함에 따라 전기 공급에 문제가 발생하자 불 펌(불파마)을 개발하여 시행(Kwak et al., 2006)하였던 역사적 사실과 그의 삶이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미용실 개업

1968년 3월, 영등포 신한 예식장을 기반으로 하여 신한 미용실(Fig. 1)을 개업하게 되었다. 예식장을 비롯하여 목욕탕과 미용실이 한 건물에 있어 L명장은 이곳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L명장은 미용에 입문하던 시기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며 시골에서 상경하여 근무하게 된 직원들에게 기숙사를 제공하여 그 곳에서 머무르며 기술을 습득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그 또한 1990년대 중반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전문 미용실(Choi, 2010) 형태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미용실 차려서 기숙사를 두고 애들 20~30명씩 데리고 있었어. 예식장에 6~7명, 샵에 10여명 있고, 한 곳이 바쁘면 서로 로테이션 하면서 일했지.” (2차 인터뷰 중 일부)

3. 미용교육자로 역할하기

1) 해외선진교육 도입

198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미용교육은 국내에서 기능·기술 훈련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L명장은 미용사로서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기술에 대한 갈급함으로 해외로 교육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1980년대 초반부터 영국의 비달사순 아카데미(Vidal Sassoon Academy), 미국 뉴욕의 징글스 스쿨(Jingles School), 프랑스의 장피에르 플로르몽(JeanPierre Fleurimon)(Fig. 2), 일본의 도쿄 미용전문학교와 야마노 미용학교 등에서 연수하며 미용기술 향상에 힘썼다.
L명장은 선진기술을 배워 직접 국제대회에 출전하여(Fig. 3) 1위 수상을 하였고, 일본에서는 강사로 위촉될 정도로 열정적이고 실력 있는 미용사로 인정받았다. 특히 비달사순과 뉴욕 징글스 스쿨에서 배운 커트에 크게 매료되어 기술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스타일과 두상, 모질에 맞게 연출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해외 유명 학교의 기술을 우리나라 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한 커트를 선보였기 때문에 후 학들에게도 L명장의 커트 특강은 인기가 있었다고 기술한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배울 데가 없어서 가서 배워 와야 해. 비달사순 커트는 보브 스타일로 많이 자르니까 그걸 배우면 한국에 와서 손님들에게는 한국 스타일에 맞춰서 해야 돼.” (3차 인터뷰 중 일부)
영국의 미용사 비달사순은 1962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커트 ‘보브(Bob)’를 시작으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을 토대로 한 기하학적인 커트 형태를 고안해낸 후, 1969년 비달사순 미용학교(Vidal Sassoon Academy)와 1973년 영국 런던에 비달사순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비달사순은 미용을 단순한 기술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예술 표현의 세계로 진입(Beauty&Health Institute, 2001)할 수 있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은 헤어디자이너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미용사의 해외 미용 교육기관 프로그램에 대한 참여가 많아지고 있다(Kim et al., 2012). 이러한 해외에서의 미용교육은 L명장을 비롯한 우리나라 미용사들에게 미용이 기술을 넘어 예술로서의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우리나라에서 미용이 기술이 아닌 예술로서 인정받기 까지는 미용인들의 자발적인 해외연수와 교육이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국내 미용교육에 한계를 느낀 미용인들은 가까운 일본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미용산업과 교육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2) 미용기술 전수

2008년 68세의 나이에 명장으로 선정되기 전까지의 삶을 살펴보면, 미용실 운영부터 기능올림픽 선수 지도 및 평가와 심사, 대학 강의를 비롯한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Fig. 4)를 진행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인재육성에 일조하기 위하여 수준 높은 미용기술 교육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대학에 미용과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L명장은 대학에서 미용 강의를 하고 특강으로 재교육, 심화교육이 필요한 만학도를 가르치는 기회도 마련하였다. 그는 특히 미용 기술교육의 여건이 부족했던 지방 곳곳을 다니며 미용인들의 기술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난 미용에 관심이 많고, 애들 가르치는 걸 좋아해. 학교다닐 때도 선생님이 애들 봐주라고 날 시키면 그게 좋더라고. 적성에 맞아. 기능올림픽 선수도 돈을 떠나서 사명감으로 가르친 거야.” (3차 인터뷰 중 일부)
그의 이러한 철학의 바탕에는 미용에 대한 애정뿐 아니라,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늘 해왔기 때문에 사명감을 가지고 교육에 임했다고 한다. L명장은 1970년대부터 대회를 준비하는 선수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미용대회가 활성화 되지 않았고, 기능·기술 분야를 통틀어서 국가에서 장려하는 대회는 현재까지도 기능경기대회가 유일하다. 국제기능올림픽은 1950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시작하였으나(World skills, https://worldskills.org), 우리나라는 1966년에 국제기능올림픽대회 한국위원회를 창립하여 지방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를 가졌고, 이듬해인 1967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대회부터 9명의 대표선수를 파견하였다(Meisternet, https://meister.hrdkorea.or.kr). L명장은 국가차원에서 대표선수를 선발하여 국제대회로 출전시키는 국제기능올림픽에 매진한 것이다. 실력 있는 선수들을 육성하여 1975년부터 국제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11년 만에 우리나라는 1977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Utrecht) 대회에서 최초로 종합우승을 하였다.
“1975년 스페인 마드리드 대회 때 내가 지도한 선수가 동메달을 따고 그 후로 1977년에 우리나라가 최초로 종합우승을 할 때 은메달을 땄어. 그 당시 미용실 번호로 대통령 하사금 전달 전화가 왔어.” (3차 인터뷰 중 일부)
기능올림픽의 황금기는 1970년대로, 1977년 종합우승을 차지하자 환영행사는 거국적인 행사로 카퍼레이드를 거쳐 국무총리 이하 9개 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대통령에게 귀국신고를 하는 것을 마무리로 언제나 시작과 끝은 청와대였다(The Kyunghyang Shinmun, 2014.02.07). 이를 시작으로 L명장은 국제대회에서의 성과로 국위선양을 인정받아 3회 이상 청와대에 초청되었다(Fig. 5).

3) 미용교구 개발

1980년대까지 국제기능올림픽에서는 제비뽑기를 이용하여 헤어 모델을 부여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모델의 얼굴형, 생김새, 모질, 모량 등 많은 요소들이 헤어작품의 변수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대회 기준이, 모델이 아닌 마네킹(가발)으로 변화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모질이나 굵기가 서양인과 다르니까 우리에게 맞는 가발이 필요했어. 가발 회사마다 들쭉날쭉해서 선수들이 연습하기 힘드니까 그걸 국제대회 기준을 가져와서 작품머리에 적합한 가발을 만들고 싶었지. 가발 회사에 의뢰하고 나는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어.” (4차 인터뷰 중 일부)
당시 국내 시장에는 작품머리를 만드는 데 적합하지 않은 마네킹만 판매되는 상태였고, 국제대회 기준에 맞추기에는 질적으로 많이 부족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L명장은 다년간의 국제대회 지도 및 심사위원 경험(Fig. 6)을 바탕으로 국제대회 기준이 되는 마네킹 두상을 본 따서 국내 가발회사에 제작 요청을 하였다(Fig. 7).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M사가 처음으로 국제대회 기준에 맞는 고품질의 가발을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대회용 가발제작사 중 독보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L명장은 사업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L명장은 다년간의 해외 경험을 토대로 미용인 교육에서의 질적 향상, 우리 미용인의 세계적인 수상실적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4. 미용명장으로 우뚝 서기

1) 명장으로서의 사명

L명장은 2008년 대한민국 미용명장으로 선정되었다(Fig. 8). 오늘날 대한민국 미용명장은 미용인 100만 명 중 단 9명으로, 이들은 고객들과 미용인 후배들도 깍듯이 예우를 갖출 정도로 희소한 가치를 부여받은 삶을 살고 있다. 따라서 고객들은 명성만큼, 시술요금이 인상될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L명장은 명장으로 선정된 이후부터 12년이 지난 2020년 현재까지 시술요금을 전과 동일하게 책정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고객들로 인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객을 소중히 여기는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만났던 고객들이 40~50년씩 만나는 단골이 됐어. 이제는 힘들까봐 예약하기도 미안하다고 하시고, 전국 각지에서 심지어는 외국에 가서도 나한테 머리하려고 3~4개월쯤은 그냥 길러서 오셔. 그럼 해드려야지. 고객들에 대한 예의고 도리라고 생각해서 최선을 다해 해드리려고 해.” (5차 인터뷰 중 일부)
그의 인터뷰를 통해 고객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으며, 명장의 사명은 최고의 기술로 시술할 뿐 아니라 인격적 성숙과 서비스 마인드 또한 갖추어야 함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지위는 자존감과 사명감을 더욱 확고히 갖게 하며, 국가와 사회 공동체에 기여하는 길로 이어져 사회적 책임감을 가진다는 Chang & Kim (2013)의 연구 결과와도 일치한다.

2) 명장의 가치와 명예

대한민국 명장이란 기술적인 면모도 최고여야 하지만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이 중요하다. L명장에 따르면 명장의 조건은, 대회출전으로 인한 입상 및 출전선수 지도, 심사, 봉사활동, 강의, 특허 등 모든 면을 갖추어야 비로소 명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품머리를 할 때 필요한 질 좋은 모발의 마네킹을 개발할 때 기술지도위원으로 실용신안을 냈지. 모질에 따라서 커트용, 펌용, 기능올림픽용, 기능장용 등으로 분류해서 용도에 맞게 쓸 수 있고 대회 준비하는 학생들이 마네킹 수급이 어렵지 않게끔 만들었지. 그리고 세라믹 판으로 제작한 플랫아이론 특허를 냈는데 모발 손상이 덜하고 모발이 탈 것 같으면 온도가 스스로 조절되는 아이론을 만들었어.” (4차 인터뷰 중 일부)
L명장은 다년간 국제적인 활동으로 미용기술을 넘어 후학들이 더욱 좋은 조건에서 미용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현재까지도 국내·외 대회에서는 모질과 용도에 따라 분류된 마네킹을 사용하게 되어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타 회사에서도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척박한 미용의 길을 걸으며 아쉽고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양질의 환경과 교육으로 후배양성에 힘썼고, 이것이 미용분야 최고의 권위를 가진 이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반면 우리나라 명장제도에서의 명장 대우에 대해서는 보다 발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우리나라의 명장제도는 독일의 마이스터(Meister)와 일본의 명공제도(名工制度)와 자주 비교되는데, 독일은 마이스터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적 고유 영역이 있으며(Park & Kim, 2007), 일본에서는 사회인식 변화에 초점을 두고 기능 존중 풍토를 조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Lee, 2009). 특히 일본에서는 현대의 명공이라 칭하는 명공제도로 쇼와 42년(서기1967년)부터 후성노동대신이 일본 최고 수준의 기능 및 기술자를 표창하는 제도로 매년 약 150명에게 수여한다(MHLW Japan. https://www.mhlw.go.jp). 일본의 명공제도를 통해 선정된 미용 분야 명공들을 살펴보면 기능·기술의 전수를 위한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Hairdressing news Japan, 2020), 독창적인 기술 개발 및 편의 제공을 통하여 국가적으로 기술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미용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헌을 인정하는 체제라고 예측할 수 있다. 종국에는 명예를 기능에 대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독일이나 일본처럼 우리나라도 기능·기술인의 업적을 통해 그 가치와 명예를 존중하고 장인정신을 고취시키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Table 1은 L명장의 생애와 미용산업 및 미용교육의 역사적 맥락을 시간순서에 따라 정리한 것이다.

V. 결 론

본 연구는 대한민국 미용명장의 생애사를 연구함으로써 개인의 삶을 통해 미용산업과 미용교육의 역사적 맥락을 도출하는 데 목적을 두고 미용명장 1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경험을 구술인터뷰를 통한 질적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미용의 역사와, 단순기능·기술인으로 취급받던 미용인이 예술성을 지닌 장인으로 자리 잡기까지 생애사의 궤를 맞추어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연구결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미용에 입문하는 계기를 살펴보면, 1960년대는, 미용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단순 기술직 중 하나라는 사회적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L명장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술을 배우기 위한 진로 선택이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의 대학 진학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의 부재로 진로 선택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미용교육의 측면에서 현재 교육계에서는 고등교육 수준에서 미용을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과거에는 기술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었고 교육기관 또한 서울에 집중되었는데, 이는 L명장도 가족의 권유로 미용기술을 익히기 위해 상경하였다는 내러티브를 통해 역사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용산업의 측면에서도 명동의 미용실에 취직을 한 L명장의 행보는 최신유행을 선도하는 곳이 서울 명동의 미장원과 양장점으로 기록된 선행연구와 일치한다.
둘째, 미용사로 홀로서기 단계에서는 1960년대에 L명장이 명동의 미용실에서 헤어디자이너로 독립하기 까지는 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현재의 청담동에서 헤어디자이너로 승급하는데 필요한 시간인 5~7년으로 나타나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L명장은 예식장과 목욕탕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의 미용실을 운영하였는데, 이는 1990년대 중반까지 주류를 이루었던 전문미용실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미용교육자로 역할하기 단계에서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 미용산업의 발전에는 자발적인 미용교육이 수반되었다. 미용이 기술이 아닌 예술로써 인정받기까지는 L명장을 포함한 미용인들의 자발적인 해외연수와 경험을 통한 서구 선진미용 교육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술적인 한계를 느낀 미용인들은 일본을 넘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교육을 받으며 우리나라 미용산업 및 교육에 있어서 기술 전수와 교구개발이라는 결과로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넷째, 미용명장으로 우뚝 서기 단계를 통해 명장의 사명은 고객 중심 철학과 인격적 성숙, 서비스 마인드를 갖추어야 함을 알 수 있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명장으로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국가와 사회에 기여해야한다는 선행연구의 결과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명장의 가치와 명예를 갖는 조건으로는 국내·외 모두 산업 환경의 개선 및 개발을 통하여 후학 양성에 힘쓴다는 것이다. 미용명장은 기술, 교육, 봉사, 사업적 측면 모두에서 전문성을 보유함으로써 그 업적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명장제도가 독일의 마이스터와 일본의 명공제도와 비교되듯이 우리나라 명장 대우에 대해 보다 발전적인 연구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본 연구는 역사의 산증인이자 미용산업과 교육에 한 획을 그은 미용명장을 대상으로 구술인터뷰를 분석함으로써 미용기술인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용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미용명장 9인 중 1인을 대상으로 한 질적 연구로써 향후 연구에서는 대한민국 미용명장을 포함한 장인정신을 가진 다수의 미용인에 대해 심도 있는 양적 연구 또한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Fig. 1.
Shinhan Beauty Salon Operation (19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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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Jean-Pierre Fleurimon Make-up school in France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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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1st place in the I.B.S International Competition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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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Beauty Technology Seminar (198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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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Blue House Invitatio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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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Judge of the World Skill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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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Wig Advisory Committee for International Stand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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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Selected as a Korean master hand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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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Life of Master L and the historical context of beauty industry and beauty education
Master L’s Life Stage Master Lfs Life History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beauty industry and beauty education
Getting started in beauty Career choice - Choosing a beauty career path to learn skills at the invitation of parents - 1950s~60s Beauty skills is preferred as one of the simple technical jobs that women can choose
Start in Myeongdong - After graduating from high school, got a job at a beauty salon in Myeongdong - At that time, Myeongdong beauty salon was a Trendy, high class and female consumption space and based on center of Korean economic development and circulation
Independent as a hairdresser Promoting to Hairdresser - At that time, took 5 years to upgrade as a hairdresser in Myeongdong - Currently, in Cheongdamdong, the promotion period as a hairdresser is 5~7 years, different from the past
- Pride in beauty skills of electric perm, hot perm, etc. - Hot perm developed after the North Korea stopped supplying electricity
Opening a beauty salon - Operating a beauty salon based on wedding halls and baths - A form of professional beauty salon that was mainstream until the mid-1990s
Role as a beauty educator Bringing an overseas education system - Since the 1980s bringing the beauty skills from overseas to improve Korean beauty skills - Since the 1990s, opportunities for overseas beauty education have increased
Transmitting beauty skillss - Focus on beauty education such as university lectures, seminars, training for national students - late 1990s, the expansion of beauty education institutions
Beauty teaching tools development - Beauty teaching tools development for International standards - As international standards have changed, necessary to apply it in Korea
Success as a beauty master Mission as a master - Having a customer-first philosophy, personal maturity, and service mind - Korean masters need social responsibility to contribute to the country and the social community
Master's Value and Honor - Requesting the need for research on the treatment of Korean masters - Discussing the Korean master’s system compared to the German Meister and Japanese master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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